뒤로가기
  • HOME
  • 소식
  • 보도자료

보도자료

게시물 내용
[인천i-View, 2019-03-18] 눈이 부시게, 오래된 청춘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2019-03-25
조회수 :
2110

현대 미술과 만난 인천​ 괭이부리말 어르신


<현대 미술과 만난 인천>은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 속 인천을 소개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지역의 공간, 사람, 이야기를 미술의 언어로 인천을 다시 바라보고, 낯설고 어려운 현대미술을 인천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연재입니다.

옅은 살구색 장막이 드리워진 입구를 조심히 들어가면, 공간 가득 얼굴 없는 몸들이 의자와 바닥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공간 앞뒤를 가로지르고, 위아래로 연결하는 얇은 천들이 유연하지만 대담하게 공간을 채운다.


‘오래된 청춘’ 전시 전경, 우리미술관, 2018 (웁쓰양 제공)


작업 사이를 제약 없이 다니며 자세히 살피면, 엷은 장막이나 얼굴 없는 신체를 감싼 천이 할머니들의 스타킹 소재라는 걸 알 수 있다. 얼굴 없는 신체는 패션 쇼윈도에서 보는 젊고 날씬한 마네킹이 아니라, 몽실몽실한 솜들이 채워진 부드럽고 느슨한 몸이다.


어디에선가 나이가 지극한 여성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수줍지만 솔직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얼굴 없는 몸뚱이들과 장막들이 있지만 기괴하거나 어둡지 않은, 편안하고 따뜻하다.


‘오래된 청춘’ 전시 전경, 우리미술관, 2018 (웁쓰양 제공)


웁쓰양 작가는 거대 자본과 시스템이 지배하는 도시 공간에서 ‘도시놀이 개발 프로젝트’들 한다. : 재개발 지구에서 물총 놀이를 하는 ‘페허의 콜렉션, 2013’, 번아웃된 도시인에게 멍때림의 유희를 안겨주는 ‘멍때리기 대회, 2014-’, 옷 입기의 주체적 행위를 위한 ‘패셔니스타워즈, 2015’, 영종도 갯벌에서 새로운 부족의 문화를 수행하는 ‘부족의 탄생, 2018’.


이러한 재기발랄하고 유쾌한 작업에 비해, 우리미술관의 전시 ‘오래된 청춘’은 조금 의외일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인천역 뒤편 새우젓골 어르신들을 인터뷰했던 ‘북성동 새우젓골 이야기’에서 근대사 궤적 속에서 남성, 여성으로서의 개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2018년 우리미술관의 작가 작업실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오랜 동네 어르신들의 개인사를 넘어, 젊음과 늙음에 대한 작업을 준비했다.


작가는 여자 어르신들, 즉 할머니들을 인터뷰했는데, 늙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성과 상품성이 떨어지고 초라하고 슬픈 것으로 여겨지는 지점에서 늙거나 아픈 육체를 넘어, 개인의 욕망과 능동적 삶을 긍정하고자 했다.


할머니들의 신체를 실측하고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작가와 스킨십이 생기면서 친밀해졌고, 늙은 신체를 기괴하거나 추하지 않고, 밝고 따뜻한 느낌을 가진 신체를 표현하기 위해 솜과 스타킹 재료를 사용했다.


소설< 괭이부리말의 아이들> 삽화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도서관)

우리미술관과 레지던시가 있는 화도진로 186번길 일대는 예전에 만석동으로 불리던 괭이부리마을이다. 화도진 앞바다에 있던 고양이섬(묘도)에서 ‘괭이부리’를 사용한 마을은 일제강점기 매립공사 이후 공장 노동자의 숙소로, 한국전쟁 직후 쪽방촌으로 만들어졌다.


김중미 작가의 <괭이마을 아이들>의 배경이기도 하고,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비관주의자인 지영이 사는 곳도 만석동이다. 작가는 달동네로 상징화된 괭이부리 마을에서 여성 어르신들의 구술사에서 드러나는 근현대사 속 개인의 구성보다 인간으로서 정서와 욕망에 초점을 두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극중 김혜자는 “마음은 그대로 몸만 늙는 거야”를 말하기도 하고, 인생의 등가교환의 법칙을 이야기한다. 알츠하이머란 질병으로 인한 기억의 편집을 시간 여행의 매개로 삼으면서 젊음과 늙음에 대해 먹먹한 성찰을 하게 만드는 드라마를 보면서 ‘오래된 청춘’의 전시 장면과 할머니들의 이야기들이 계속 맴돌았다.


작가는 도시 일상과 스펙터클 안에서 열심히 착하게 살아가려 애쓰지만 오히려 소외와 소비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자발적인 표류와 일탈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렇기에 어슬렁거리며 노는 방법을 찾는 ‘도시놀이 개발 프로젝트’와 꼰대 같은 혐오대상 혹은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되는 늙음의 신체와 욕망을 다시 바라보는 ‘오래된 청춘’은 다르지 않다. 작가는 공동체와 개인 사이를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횡단하는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 http://enews.incheon.go.kr/usr/com/prm/BBSDetail.do?menuNo=1003&bbsId=BBSMSTR_000000000363&nttId=5482